워싱턴 DC 내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위험한 지역이 아니다. 거리에 걸인들이 서넛 있지만 생명의 위협을 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 근처를 지나갈 때 "돈 있니?" "도와줄래?" 묻는 정도이다. 대개는 마치 세든 사람처럼 특정 장소에 늘 같은 사람이 있다. 가게 주인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법도 하지만 안 그러는 것같다. 어떤 이는 늘 어떤 가게 앞쪽 구석에 앉아있으면서 나오는 손님들에게 구걸을 한다.
노숙인들은 없었는데 지난 여름부터 지하철 입출구 근처에 터를 잡고 숙식하시는 노숙인이 한 명 생겼다. 6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이 백인 남자는 한겨울에 두꺼운 옷이며 담요를 깔고 덮고 그 안에서 죽은 듯이 잠을 자거나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지나가다가 죽었나, 신고해야하나 갈등하기 시작할 때쯤엔 누더기가 움직인다. 그 옆을 지나면 씻지 않아서 나는 찌든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처음 나타난 곳은 지하철 입구 근처에 있는 벤치였다. 짐을 풀고 (일부는 옆에 쌓아놓고) 터를 닦았는데 (?)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떨어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길까지 가서 보금자리(?)를 만들었는데, 경찰로부터 그쪽엔 얼씬거리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건지 주민으로부터 된통 혼이 난 것인지 그 쪽으로는 더이상 오지 않는다. 이후 그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고 있지만 주로 지하철 입구 근처 나무 아래 또는 그 근처 빈 곳에 터를 잡는다. 아마도 누군가 귀찮게 하면 자리를 옮겼다가 며칠 후에 다시 같은 곳으로 오는 것같다. 최근에는 뛰어난 위장술로 쓰레기 자루들이 쌓여 있는 더미 중간에 버려진 듯이 보이는 파란 비닐 안에 온 몸을 숨기고 숨쉴 구멍만 내놓고 누워계셔서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않는 한 사람이 거기 있는지 알기 어렵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을 이 분이 왜 노숙자가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노숙자가 되었다는 것은 가족친구들과 인연을 끊고 사회생활을 포기한 것이려니 했다. 정글이나 다름 없는 이 도시에서 버려진 짐승처럼 사는 모습은 어떤 이에게는 연민을, 어떤 이에게는 경멸을, 어떤 이에게는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오늘 식료품점에 다녀오는 도중 쓰레기 더미 사이 그분이 자리 펴고 누워계신 곳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커다란 비닐 쓰레기 무더기에 안쪽에 몇 겹으로 깔고 덮은 이불인지 옷인지 구분도 안되는 누더기 안에 깊이 파묻혀있는 그분이 바닥에 배를 대고 마치 침대에서 하듯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고 계셨다. 스마트폰은 싸구려 구형폰이 아닌 것같았다. 순간 멍!
하긴, 노숙자는 그저 길위에서 잠자는 사람이란 의미고 homelss란 영어는 집이 없다는 말이지 휴대폰이 없단 말은 아니다. 누가 알겠는가? 그는 부자인데 삶에 염증을 느껴 노숙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외관이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노숙자 연구를 위해 직접 체험하기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빚독촉에 시달리다 노숙자가 되었지만 가족과 친구들과의 인연은 끊지 않고 이어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님 내 모든 상상력이 실패한 그런 사연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바람 막아 줄 벽 안쪽이 아닌 바깥쪽, 세찬 눈보라치는 얼어붙은 길위에서 잠을 자는, 삶을 포기한 듯한 노숙자의 스마트폰은 뭔지 어울리지 않았다. 세포자가 세상과 연결되어 남아있고픈 욕망의 모순이랄까...
*캘리포니아에서는 일을 다녀도 주거비를 충당할 수 없어 노숙인이 된다고는 하나 이 분은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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