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 믿고 아파트 매매 계약서 서명한 그녀
2000년 지방에서 서울로 직장을 옮길 때 내가 수중에 가진 돈이라곤 300만원이 전부였다. 용산에 있는 새로운 직장의 전임자에게 그 돈으로 어디서 방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날 빤히 바라보셨다. 서울은 어려우니 의정부나 수원같은 경기도에 있는 도시로 나가야할 것이라고 답하셨다. 그분이 이들 도시들을 콕 찝어 말한 이유는 거기에 셔틀버스가 다녔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동생이 사는 강북에서 더 가까운 의정부에서 방을 얻기로 하고, 의정부 시내 전세 300에 월 30만원하는 단독주택에 딸린 방에 입주했다. 두어달 의정부ㅡ서울간 통근을 한 후 나는 서울에 들어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매달 월세로 버리는 거금이 아깝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버스전용차로가 없던 당시 통근버스로 의정부에서 용산까지 오는 데는 기본적으로 1시간반이 걸렸고 퇴근하는 데는 2시간 이상 걸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통근시간만 4시간이 걸리는 것이 엄청난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의정부에서 가장 가까운 구는 도봉구였다. 나는 내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삼각지역에서 30분 가량 걸리는 창동역 근처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매입하기로 했다. 십 여 년 간 이사만 열두 번도 더 다녀서 떠돌이 생활에 지쳐 있었고, 또한 좋은 직장으로 옮겼으니 이젠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창동역과 녹천역 사이에 있는 부동산소개소를 돌아다니고 아파트를 보러 다니다가 꼭 마음에 드는 15평 짜리 주공아파트를 발견했다. 매매가가 5400만원이었는데, 내가 가진 현금은 300만원이 전부였기 때문에 5100만원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어떤 지인에게 정말 어렵게 혹시 돈을 빌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분은 내가 어려운 줄은 알겠으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돈거래를 하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셨다. 그 이후 나는 아무 힘들어도 지인이나 친구에게는 일절 돈 꿔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대출방법을 알아봤다. 내 직장인 신용대출과 어머니가 시골에서 빌릴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누군가 매매금액의 70%를 HSBC 은행에서 30년 상환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 문제는 HSBC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려면 아파트 매매계약서를 증빙서류로 제출해야 하는데, 매매계약서는 매매대금을 입금해야 서명해준다. 나는 대출을 받아야만 매매대금을 입금을 할 수 있는 처지였다. 나는 내 곤란한 상황을 부동산중개인 아주머니와 매도인 사모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믿을만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그리고 그분들이 선하시고 나를 믿어주신 덕에 매도인 사모님은 내가 모기지론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먼저 매매계약서에 서명해주셨다. 그 덕분에 무사히 모기지론을 받아 제때에 잔금을 입금할 수 있었다.
그 분이 마음을 졸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내게 천사처럼 보금자리를 가지도록 도와주셨다. ㅂㅇㄹ - 23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당시 진정한 나의 천사이셨다. 지금도 창동에 사실까?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시길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