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버들 2023. 4. 22. 21:09

J언니를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영어영문과 어학실 조교이셨던 그분이 나를 부른다는 전갈을 받았다. 어학실은 일주일에 한번 영어회화수업 때문에 갔었고 수업 전 그 언니는 어학실 준비상태를 점검하셨다. 화장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늘 수수한 옷차림을 하셨고 말도 별로 없으신 분이셨다. 나와는 나이차가 좀 있으신 걸로 들었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나를 보자고 하니 나는 무슨 일 있나 싶었다.

언니는 차를 대접하며 내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으셨다.
  "뭐 그냥... 무슨 일로...?."
언니는 내가 눈에 들어와서 그동안 눈여겨 보시다가 그제야 차나 한 잔 하자고 부르셨다고 했다.
"아.. 네..."

그 후 언니는 가끔 나를 부르셨고 나는 어학실에 가서 정말 담담한 대화를 나누었다. 말보다는 침묵이 더 많은 만남이었다. 언니는 차를 끓여주셨고 함께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어학실 창문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겨울 눈 오는 풍경, 차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꿈처럼 아스라하다.

언니는 내게 학생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소개시켜주셨고 그 덕에 4학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용돈을 벌어 쓸 수 있었다.

한번은 어학실에 있는 영어 카세트테이프를 모두 복사하여 내게 주셔서 나를 놀래키셨다. 당시 카세트테이프는 내 환경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다. 언니는 자비로 공테이프를 사신 후 시간 나실 때마다 복사하신 것이다. 지금처럼 몇 초 만에 복사되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하나하나 복사하시는 데 든 시간 만도 꽤 됐을 것이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120개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대가도 바라지 않으셨다.

"나중에 잘 되면 그 때 주려므나"
하셨다. 나는 너무 감격하여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 언니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나는 그 테이프를 다 들었다. 내가 지금 워싱턴 디시에 와 있는 것은 어쩌면 그  언니 덕분일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제대로된 직장을 잡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나는 여전히 힘든 삶을 보내고 있어서 한동안 언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여 생활이 어느 정도 편안해졌을 때 나는 언니에게 연락했다. 언니는 조교를 그만 두시고 몇 년간 출판사에서 근무하셨고 그 후에는 과외를 하시며 생활하고 계셨다.

이때부터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호칭대신 언니라고 부르는게 좋겠다고 하여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 생활에 여유가 생기니 나는 언니에게 화장품이든 옷이든 이거저거 선물해주려 했다. 언니는 다 딱 자르시며 안 받으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언니가 사서 녹음해주신 카세트 값도 못 갚고 있다.

언니가 사시는 작은 아파트에 두 번 갔었다. 언니는 정말 도닦으시는 분처럼 사시고 있었다. 방안에는 천옷장과 작은 수납장, 언니가 당시 읽으시던 책들만 몇 권 꽂혀 있는 작은 책꽂이, 담요와 이불, 책상겸 밥상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나한테는 충격이었다. 수녀님이나 스님보다 더 단촐하게 사시는 모습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내가 미국에서 너무 힘들어할 때 언니가 말했다.
"너무 힘들면 다 내려놓고 그냥 한국에 와라. 내가 밥은 먹여주마."

나를 감동으로 눈물나게 하신 분이시다. 언니는 그저 내가 잘 되면 기뻐해주실 뿐이다.  내가 힘들어하면 오직 격려만 해주신다. 내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언니를 생각하면 빨리 헤어나와 언니가 자랑스러워할 동생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언니가 있어 내 삶은 풍요롭다. 늘 거기 계셔주셔서 감사하다. 🙏

Angel (2022/8/20 그림)